마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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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이야기

대동여지도에는 풍기읍이 소백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죽령 바로 전 한 줄기가 동남쪽으로 산줄기를 뻗으며 내린 끝자락에 읍이 형성되어 있고, 현재의 지형도에서는 좀 더 상세하게 동남쪽으로 진행하여 우측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영주 풍기 금계리 대동여지도  


영주 풍기읍 금계리 위성사진 


주된 산줄기의 모양(간룡법)
우리나라의 근간인 백두대간상의 큰 산줄기 태백산(1567m)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 국망봉(1421m), 비로봉(1440m), 민배기재와 연화봉(1394m)으로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소백산줄기를 따라 내려와 동남쪽으로 만들어진 곳으로 태백산이 태조산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소백산줄기는 ‘희다’ ‘높다’ ‘거룩하다’ 등을 뜻하는 ‘ ’에서 유래된 백산(白山)이 여러 개 있는데, 그 중 작은 백산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 소백산이며, 태백산에서 이어받은 산줄기가 국망봉을 크게 기봉하고 계속 남서쪽으로 부드럽게 달린 산줄기는 다시 한 번 기봉하여 주봉인 비로봉을 중조산으로 크게 일으키고 있습니다.
소백산은 예로부터 신성시되어 오는 산으로 삼국시대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경계를 이루어 수많은 역사적 애환과 문화유산이 전해지는 산으로 장엄하고 완만한 산등성이와 끝없이 펼쳐지는 운해와 울창한 삼림, 수려한 계곡을 거느린 중조산을 뒤로 하고 계속 남서쪽으로 내려간 주룡은 제2연화봉(1357m)을 일으키고, 남서쪽에서 두 갈래로 나누어진 산줄기 중 한 줄기는 그대로 이어져 동남쪽 기슭에 두운조사가 창건했다는 유명한 희방사와 희방폭포가 있으며, 다른 한줄기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동남쪽으로 급선회하며 금계리의 현무봉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동남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주룡은 삼각형 봉우리인 탐랑봉을 만들며 좌우로 날개를 활짝 펼쳐 안정되고 편안한 모습을 이루고, 날개를 핀 개장의 모습이 마치 안으로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을 닮아서 선조들은 이곳 마을을 금계포란형의 명당이라 부릅니다.
금계리 뒤쪽 용천마을을 향해 중심출맥으로 뻗어내린 주룡은 계곡내 야트막한 탐랑성의 결정체인 손등처럼 생긴 분지형 마을을 형성하므로 귀인대좌형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용천마을 주변 산줄기의 모양(장풍론)
용천마을 뒤 주룡에서 나온 우측 백호산줄기는 여러 겹의 산줄기들이 형성 내백호쪽 산줄기가 반원을 크게 그리며 연속으로 풍요로운 재물을 상징하는 둥그스런 산줄기인 금성으로 이어지면서 좋은 기운을 만들고, 주룡의 좌측 산줄기는 짧은 내청룡산줄기와 밖으로 외청룡산줄기가 크게 감싸 안아 밖으로 넓은 명당을 형성하여 여러 마을들은 감싸 안고 동남측으로 터를 만들고 있습니다.
안쪽으로 좌우의 청룡, 백호산줄기들이 겹겹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흘러 수구막이도 완벽하게 관쇄도 여러 겹으로 긴밀하고, 안의 기운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갈무리를 잘하고 있습니다.
안정된 평지에 상당한 농경지를 확보할 수 있어 난세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안정된 생활이 가능한 지역이며, 앞쪽으로 내수구를 막고 멀리 조·안산이 잘 펼쳐 있어 조망권이 좋고, 따라서 전후좌우의 산줄기가 조화를 잘 이루고 있습니다.
물흐름(득수론)
물은 재물을 관리한다고 하는데, 용천마을 안쪽 계곡수는 수량은 풍부하지 않으나 겨울에도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어 재물의 마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용천리 마을의 물줄기들은 좌우측 협곡에서 맑은 계곡수를 얻고 있으며, 마을외의 물흐름인 수세는 남원천이 희방폭포에서 득수하여 동남쪽으로 풍기읍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좌측산줄기와 같이 남쪽으로 진행한 금계호의 물줄기가 합수처를 이루고 서천으로 이름을 바꾸고 계속 동남쪽인 안정면으로 향해 흐르며 물줄기는 이어져 영주시를 지나면서 내성천을 이루고 있습니다.
조망권(좌향론)
금계리는 동남향으로 터를 배치하여 따사로운 햇볕을 받고, 터의 모양은 풍수의 기본형국을 제대로 갖추고 여러 겹의 백호산줄기와 청룡산 줄기가 서로 잘 감싸 안은 긴밀한 관쇄를 갖춘 교과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짧은 청룡산줄기를 외산의 외청룡산 줄기가 지켜주면서 안산과 조산의 역할을 하고 나지막하게 업드린 자세를 취하며, 금계리 뒤 용천리 마을에서 내려다 본 경관은 풍수 장풍국의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고 자연과 어울림을 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풍기읍 금계리 풍수산도

마을 이야기

조선시대 고지도에 나타난 금계리를 살펴보면 우선 마을 주변을 둘러싼 주봉이 되는 소백산과 연화봉, 비로봉, 원적봉이 보이고 있다. 현 금계리 마을을 구교리와 백야동, 용천동 등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읍치와 관련하여 향교, 사직단, 제운루 등이 있고, 읍치의 비보수인 직송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외 전천, 후천, 욱양서원, 금선정 등이 나타나 있으며, 고지도에 표현된 대상들이 현재 읍치와 관련하여 향교, 사직단 등이, 자연 대상으로는 산, 천 등이, 그 외 금선정 등이 남아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1872년 풍기팔면지도
구교리(舊校里) 도솔봉(兜率峯) 백동리(白洞里) 사직(社稷) 소백산(小白山) 직송(植松) 연화봉(蓮花峯) 용천동(龍泉洞) 원적봉(園寂峯) 읍치(邑治) 전천(前川) 점방산(占方山) 향교(鄕校) 후천(後川)

여지도
객사(客舍) 도솔봉(兜率峯) 백야동(白也洞) 비로봉(毗盧峯) 소백산(小白山) 아사(衙舍) 욱양서원(郁陽書院) 점방산(占方山) 제운루(濟雲樓) 죽령(竹嶺) 향교(鄕校)

금계리의 도로구성을 살펴보면, 풍기읍내에서 삼가리로 이어지는 주도로에서 금계중학교가 위치한 초입마을로 진입합니다.
초입마을에서 산으로 둘러싸인 안 마을인 용천동으로는 남동쪽으로 트인 입구를 지나 하나의 진입도가 있으며, 용천동의 중심에 이르러 자연지형에 따라 마을공간과 도로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금계리와 용천동의 위치



금계리의 마을 자원에서 대표적인 경관요소로는 금계리의 배경이 되는 소백산과 연화봉을 잇는 연봉들과 소백산 자락의 농촌환경을 들 수 있으며, 그리고 조선시대 풍기읍치에 잔존하는 시설물들이 있으며, 금계리에는 성황당과, 숱가마터, 마을입구 당나무가 있습니다.
풍기의 경제활동 기반이 되는 작물로는 산삼과 사과가 대표적입니다.

마을 역사와 인물 이야기

조선조 태종 13년(1413)에 순안군을 영천군(榮川郡)으로 개칭하고 군수(郡守:종4품)와 육방(六房)을 두었다. 순흥부는 태종 13년(1413)에 순흥도호부가 되고 별호(別號)를 순정(順政)이라 하였으며 도호부사(都護府使:정4품)를 두었다. 한편 기주는 5대 문종의 태를 안장한 이후로, 은풍(殷豊)과 기천(基川) 두 지명을 합하여 풍기군(豊基郡)이라는 명칭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러나 순흥도호부는 세조 3년(1458)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금성대군(錦城大軍)이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실패함으로써 폐부가 되어 영천군, 풍기군, 봉화현에 각각 활속(割屬되었습니다. 그 후, 225년 만인 숙종 9년(1683)에 다시 순흥도호부로 복설되었으나, 고종 32년(1895)에 순흥도호부를 폐지하고 순흥군으로 개편되었습니다.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1913. 12. 29)로 행정구역이 개편(府·郡制 통폐합)되어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통합하고 영주군(11개면)이라 개칭하였으며, 당시 풍기군의 관할이었던 상리(上里), 하리(下里)는 지역적인 관계로 예천군으로 편입되었으며, 순흥군의 수식(水息), 수민단면(水民丹面)은 봉화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고려 후기에 들어와서 중국으로부터 성리학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리학은 처음 소학을 중심으로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실천적인 윤리를 중요시하는 면에서 수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인생과 우주의 근원을 연구하는 철학적인 면이 발전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리학을 처음 전래한 학자는 안향이었습니다. 경북 지역에서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된 시기는 무신 집권기와 몽고의 침입 기간이었습니다. 이때 개경 문벌 귀족 사회가 무너지고 상층 향리 자제가 군공과 과거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습니다. 특히 몽고 침입으로 이를 피하기 가장 좋은 곳이 소백산맥 이남의 산간 분지였습니다. 이때 각처에서 호장들은 주민을 독려하여 몽고와 항전을 계속하였고, 강화도로 천도한 최씨 정권은 이들의 군공을 인정해 주거나 과거로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고려 말기 상층 향리의 대부분은 신진 사대부로써 지배층 속에 포함되어 갔습니다.
조선 건국의 주체 세력인 사대부와 신흥 무인들은 유학을 숭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외 정책으로는 명나라를 가까이하고 원나라를 멀리하였으며, 사회 경제적으로는 전제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고려 말 권문세족의 기반을 정리하여 재분배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이 건국되고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는데, 정도전은 조선 건국을 도모한 주도적인 세력이었으며,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과 지배 기구를 마련하는 데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유학 교육을 담당한 기구는 관학으로 중앙에 성균관과 4부 학당을, 지방에 향교를 설치하였으며, 사학으로 서당, 서원 등이 설치되어 교육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이 지역에는 풍기향교가 설립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순흥면 내죽리에 설립되었다. 17세기에는 순흥에만 서당이 14개가 세워졌다고 하니, 이 지역은 다른 어느 고장보다 교육적 기능이 뛰어난 곳이었다.
16세기 말에, 조선은 왜란이라는 큰 고비를 맞게 됩니다. 지배층의 분열이 국력의 쇠퇴를 가져와 조선은 한 때 전 국토가 유린되는 등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도 전국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의병이 조직되어 많은 활약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이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인 오운은 의병 대장인 곽재우 휘하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며, 김대현, 곽수지 등은 김륵과 함께 의병을 모으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걸쳐 항일 운동이 치열했던 지역이 풍기입니다. 한말 의병운동은 대략 3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1기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실시로 인한 의병 운동 시기로, 이 지역 출신 의병장으로는 장복규가 충북 제천에서 서상렬과 함께 싸우다 왜경에 체포되어 전사하였습니다. 당시 이 지역 주민들은 궐기를 위하여 향회(鄕會)를 열고 일제 침략의 토벌문(討伐文)을 각 문중으로 보내니 의거원병(義擧援兵)이 구름같이 모였습니다. 대개, 당시는 사림(士林)의 망사(望士)로 조직되었으나 전투에 참가하고자 하는 의사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제2기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인한 의병 운동 시기로, 전국적으로 일제(日帝)에 대한 항쟁(抗爭)이 일어나 1906년에서 1910년까지 5년간 왜병과 접전하여 서로가 수많은 생명과 재산의 피해를 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소백산 풍기, 순흥 전투가 가장 치열하였습니다. 안정면 동촌리에 살던 박수석은 의병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1913년에 고현리에서 총살당하였습니다.
제3기는 1907년 고종 황제의 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인한 의병 운동 시기로, 1기 2기와 달리 어느 정도의 병력과 조직을 갖추어 대규모적인 항전을 감행하였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탁지부 주사로 있던 서재승(현재 백산서원에 배향)이 의병으로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풍기읍 창락리에서 총살당하였습니다.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조직하고 있을 때, 파리 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다는 것을 들은 김창숙은 경상도 유림들의 청원서를 프랑스 파리로 보내려 하다가 여기에 가담한 137명이 체포되었습니다. 그 중 김동진(부석면 상석리), 권상두(영주시 하망동), 정태진(영주시 상줄리)과 의열단 단원으로 활약하다 체포된 송영호도 이 지역의 인사입니다.
1913년에는 풍기 출신의 채기중 의사가 주축이 된 국내 최초의 항일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단이 풍기에서 결성되었습니다. 이 대한광복단은 그 활동 범위를 전국적으로 넓혀갔습니다. 풍기와 대구는 서로 접선하여 드디어 광복회란 이름으로 통일하고 일본의 침략세력을 몰아낼 때까지 죽음으로 싸울 것을 선언문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1918년에 조직망이 발각되어, 수많은 의사들이 형장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습니다. 그들의 독립 정신은 이듬해 3.1 만세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현재 풍기읍에 위치한 동양대학교의 동편에 대한광복단 추모 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북 출신 실향민의 마을 이야기

19세기 말 한반도가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에 휘말리면서 풍기에는 외지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비결서에 나타난 병란의 참화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모여든 것입니다. 현재 주민들의 대부분은 그때 이곳으로 온 사람들의 2세거나 3세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풍기를 두고 ‘작은 서울’이라고 부릅니다. 풍기의 토산품인 인삼이나 인견, 그리고 사과 수확은 대개 그 당시 모인 사람들이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고안해낸 산업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지난 60, 70년대 풍기는 영풍군(오늘날 영주시)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 중앙고속도로가 완전히 개통되면 풍기는 새로운 기회를 맞게 됩니다. 과거의 은둔적인 십승지가 아니라 영남 제1의 경제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다. 또 “사람의 씨를 보존한다.”는 소백산이 곁에 있는 한 교육 도시로 각광받게 될 것입니다.
배고픔이 없고 전쟁의 위험이 없는 안전한 곳을 찾아 헤매다가‘십승지 중의 일승지에 정착했던 이북 출신 사람들의 애환과 희망의 깃든 장소가 바로 금계동, 욱금동, 삼가동인데, 이러한 이북 출신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들은 나라의 소중함과 자유에 대해 성찰하는 기회를 주고 있다. 특히 전쟁과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세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소백산 아래의 십승지 마을은 소백산의 숨겨진 마지막 보물이며 그들의 이야기는 후대에 교훈으로 남겨야 할 전쟁과 배고픔의 이야기일진대, 이 고을은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제2의 십승지 시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십승지 마을로 알려진 풍기의 금계리와 욱금리, 삼가리는 마을 전체 인구의 70 퍼센트가 이북 출신의 정착민과 그 후손들에 의해 형성된 곳입니다. 그들이 십승지 마을의 주민이 된 연유는 바로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에 가운데 일승지라는 사실을 믿고 이곳을 찾아왔기 때문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원당덕 할아버지(76세)는 9세 때 아버지와 함께 평안남도 개천에서 이주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1946년 3월 3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지게에 이불과 솥과 같은 간단한 살림 도구와 옷을 짊어지고, 어머니는 머리에 물건을 이었기 때문에 그는 삼촌의 손에 이끌려 밤낮으로 걷고 걸어 12월이 돼서야 마침내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가족은 이곳이 [정감록]에 나타나 있는 십승지 마을에 해당하기 때문에, 풍수지리설을 믿고 삼가동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삼가동에 정착한 오광철 할아버지(80세)의 70년 전(前) 주소지는 평안북도 희천군 동창면 창동 6번지입니다. 1945년 12월에 그의 가족과 이웃 사람들 33명이 정든 고향을 버리고 걷고 걸어 휴전선을 넘어 <정감록>에 기록된 희망의 땅인 풍기읍 삼가리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어 인민군과 한국군을 피해 산속으로 피해 숨어살기도 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까지도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던 피난민들의 대부분은 현재 작고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부모의 뜻을 이어 풍기 고을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삼가리에 살고 있는 새마을 지도자 양승백 이장(53세)은 1946년에 조부의 권유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평안도에서 정감록의 마을을 찾아 이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양승백 이장의 조부는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남다른 교육열을 지녀서 일찍이 아들을 고등 교육까지 시키셨는데, 아들에게 소백산 아래 삼가리로 먼저 피난 가 있으라고 말하면서 돈으로 만든 짚신을 아들 손에 쥐어 주었다고 합니다. 양승백 이장의 아버지는 피난민 사이에 끼어서 소백산 아래의 삼가리로 왔는데, 6․25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산속에서 숨어 지내기도 하였답니다. 근면 성실한 아버지가 물려준 수 천여 평의 과수원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양승백 이장은 작고한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며 이장으로 솔선수범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래숲 전종갑 대표(57세)는 9세 때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에서 욱금동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조부는 피난을 오기 전부터 피난처를 물색한 끝에 욱금동을 답사하자 이곳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가족이 모두 이사 왔기 때문에 이곳에 농토를 개간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전종갑 대표의 아버지는 슬하의 자식들에게 항상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놓으라는 훈계를 내렸다고 합니다. 특히 그의 아버지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세상이 온통 잿더미로 파괴되더라도 인간의 씨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이곳 소백산뿐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정감록의 감결은 풍기 차암 (車岩) 금계촌 (金鷄村)이 십승지의 으뜸으로 꼽았으며, 남사고도 피난처로 소백산을 으뜸으로 꼽았습니다. 특히 이 지역에서는 교촌2리 뒷산에서 영주시와 풍기읍을 경계로 하여 원적봉, 달밭재, 제1연화봉, 제2연화봉을 넘어 곰넘이재, 금계리로 내려오는 금계포란형의 모양을 주목하게 된다. 금계라는 지명은 풍수에서‘닭이 알을 품고 있다.’고 하여 불린 지명인데, 또 다른 이름은 임실입니다. 예로부터 금계리는 돌이 없는 곳, 바람이 없는 곳, 죽령이 보이지 않는 곳, 이 세 가지 조건을 피할 수 있는 지역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풍기의 인견 생산은 우리나라의 6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정감록에 의하면 난세에 첫 번째 피난처가 풍기 땅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감록을 믿고 함경도를 위시한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많이 살았답니다. 인견 직조 공장이 많은 이유도 그들의 강인한 생활력 때문이었습니다. 이북 사람들이 금계리로 피난 온 이유는 솔개(도솔봉)가 금닭(금계바위)을 위협하면 노인(노인봉)이 지팡이로 솔개를 쫓아 금닭(금계)을 항상 보호해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죽령의 왼쪽에 자리한 높은 봉우리가 도솔봉이며, 풍기읍 금계리 뒤쪽 산에 금계 바위가 자리해 있습니다. 또한 노인봉은 동양대학교 옆에 있는데, 노인봉 앞에는 지팡이같이 생긴 작은 산이 있습니다.

금계바위 이야기

예로부터 전해오는 피난처 10곳 중에 으뜸으로 꼽는 곳이 경북 소백산 줄기에 자리한 풍기읍 금계촌입니다. 정확한 지명은 영주시 풍기읍 금계1동(쇠바리 마을)으로 뒷산에는 유명한 금계바위가 있고 산줄기가 동네를 포근히 감싸 안아 마치 금계가 알을 품는 즉‘금계포란형’의 명당으로 동네이름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금계란 말 그대로 금 닭으로서 산 위의 바위들이 마치 닭 벼슬처럼 생겼다고 해서 만들었는데 일제 강점기 시대에 광석을 캐기 위해서 폭파한 후로 원형을 잃고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지금은 삼가동(三街洞)이라 하나 옛날에는 금계동(金鷄洞)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10승지지(十勝之地)로 100여 년 전부터 많은 피난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장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면 이곳에서 인간의 씨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풍기읍과 그 일대에는 이북 출신의 많은 피난민들이 살기도 합니다.
마을의 뒷산에는 닭의 모양과 비슷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가리켜‘닭산’ 즉 금계 바위라고 부릅니다. 옛날 이 바위의 가운데 부분에는 많은 금이 묻혀 있었다고 하며 또한 닭의 눈이 되는 부분에는 두 개의 빛나는 보석이 박혀 이 마을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동네의 수호신으로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어떤 나그네가 이 바위에 대해 들은 바가 있어 일확천금을 노리고 가파른 절벽을 간신히 기어 올라가 금계 바위에 박힌 보석을 빼려고 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덮이기 시작하며 캄캄한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이 벼락으로 인하여 바위의 일부분이 무너져 내리고 그 나그네는 바위에 깔려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그네가 빼려고 한 보석은 묻혔는지 간 곳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는 후에 이 마을은 차차 가난해지기 시작하고 사람이 살기가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없어진 보석을 캐내려고 이 마을에 많이 모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바위의 형태도 닭처럼 보이지도 않은데, 다만 그 당시의 일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많은 수정 조각들이 금계 바위 부근에 흩어져 있습니다.

동자로 변한 산삼

옛날 소백산 도솔봉으로 들어서는 앞 두들(풍기읍 전구리) 마을에 한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도솔봉에서 제일 큰 산삼이 풍기장날만 되면 초립동자의 모습을 하고 내려와 어디를 갔다가 해 질 무렵이 되서야 올라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농부는 “옳지! 다음 장날엔 길옆에 숨어 기다리다가 초립동자가 내려오면 뒤따라가서 무엇을 하는지 살펴보고 도솔봉 어디로 가는지 확인해 보리라.”하고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마침내 풍기 장날이 되자 농부는 길옆에 숨어 있다가 얘기 들은 초립 동자를 발견하고선 뒤를 밟아 풍기읍내까지 따라 왔습니다. 동자는 이리저리 다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갔고 농부도 함께 따라가 한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고 음식 값까지 대신 치르고 나왔습니다. 그 동자가 농부에게 다가와 “서로 모르는 처지인데 어찌 제 음식 값을 대신 내십니까?”하고 묻자 농부는 음식 값이 얼마 되지 않아 그냥 내가 지불했다고 대답했습니다. 둘은 어느새 동행이 돼 장을 구경하고 함께 집으로 올라가는데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서 농부가 동자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놨습니다. 얘기를 듣고 난 동자는 “사실은 내가 도솔봉에 있는 산삼 밭 가운데 가장 큰 동삼인데 사람으로 변신해 동자 행세를 하고 있다.”며 “산삼을 얻고 싶은 당신의 소원을 들어줄 터이니 지금 곧 나와 함께 도솔봉으로 올라가자.”고 했습니다. 동자는 대신 산삼 밭에 도착하면 서 있는 자리에서 가장 큰 삼으로 변해 땅으로 들어 갈 터이니 자신은 뽑지 말고 그 밭에 있는 나머지 산삼을 캐 가라고 했습니다. 이윽고 도솔봉의 산삼 밭에 도착하자 동자가 삼으로 변해 땅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농부는 깜짝 놀라 눈앞에 커다란 산삼을 보자 돌연 마음이 변해 그 동자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리고 제일 큰 삼을 잡아당겼습니다. 그 순간 삼 뇌두가 떨어지며 그 안에서 점심때 먹은 음식물이 쏟아져 나왔고 눈앞에 있던 산삼 밭은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대신 그곳에는 옻나무와 부추 밭만 있었고 그날 이후 농부는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형제와 산삼

소백산 형제봉 아래 한 산골 마을에 노부모를 모신 형제가 살고 있었다. 형제는 장성하면서 사냥기술을 익혔는데 어느 날 형제는 더 많은 사냥감을 잡으려고 산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때 한 노인이 충고하길 “곧 겨울이 닥치는데다 산중의 날씨는 쉽게 변하니 만약에 깊은 산 속에서 갑자기 눈이라도 내리게 되면 큰일 난다. 그땐 산에서 내려오려 해도 올 수 없으니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이 형제는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 길로 산속 깊이 들어가 며칠이고 온 산을 누비며 짐승을 사냥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날씨가 험악해지더니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눈 때문에 꼼짝없이 산속에 갇힌 형제는 눈이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사이 우선 지낼 곳을 찾다가 커다란 고목을 발견하고 그 속을 후벼 팠더니 둘이 족히 지낼만한 구멍이 생겼습니다. 형제는 그 나무 구멍에서 지내며 눈이 녹아 내려갈 날만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던 어느 날 사냥을 하던 중 한 외진 곳에서 식물의 줄기를 발견하고 밑을 파헤쳐 보니 그 속에서 마치 사람처럼 팔다리가 달려있는 뿌리가 나왔습니다.
맛을 보니 단맛이 감돌았는데 먹어도 되겠다 싶어 그 주위를 살펴보니 같은 뿌리가 많이 있어 다 캐내어 나무구멍 속에 저장해 두고 먹었습니다. 형제는 이 뿌리를 먹은 후로 온몸에 힘이 솟는 것을 느껴 어느 날은 조금 많이 먹었더니 코피가 났습니다. 그 뒤로 한 번에 많이 먹지 않고 매일 조금씩 먹었습니다. 이렇게 낮에는 사냥을 하고 밤에는 나무구멍 속에서 쉬며 지내다 드디어 날씨가 풀려 형제는 간신히 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형제가 얼어 죽지 않고 도리어 원기 왕성하게 살이 쪄서 돌아온 것을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묻자 형제는 이것 덕분이라며 풀뿌리를 꺼내 모두에게 보였으나 누구도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훗날 이 풀뿌리를 마치 사람과 닮았다 해서‘인삼’ 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유계 송선생

유계(幽溪) 송지향(宋志香, 1918-2004) 선생의 출생은 일제 강점기였던 1918년 8월 26일 평안북도 박천군 동남면 동하동 221번지에서 부 송국훈, 모 차남훈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고향 이북 향리에서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하였습니다. 12세 때 유계는 아버지를 따라 동생 두 명과 함께 [정감록]의 피난처로 알려진 풍기읍의 금계리로 이주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형제들도 이 시기에 모두 월남하였는데, 유계 집안의 가정형편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금계리의 오두막집에서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생활을 하다가 20세가 되어 유계는 신천 강씨 문중의 여성과 혼례를 이루어 분가하였습니다. 그는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으나 뜻한 바가 있어 사촌 형인 송지영(전 조선일보 편집국장, 전 문화예술진흥원장)과 함께 삼가리의 달밭골에서 한문, 국문학, 역사 등의 학문에 전념하게 됩니다.
유계가 금계중학교에 재직할 당시에는 흰색의 한복을 입었으며 평생토록 양복을 입지 않았으니 선비의 강직한 기상을 간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학교를 떠난 이후에는 잠시 동안 평소에 익힌 의술로 환자를 치료한 일도 있었으나, 돈을 받지 않아서 생계에 보탬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가정의 생계를 부인과 아들에게 맡기게 되었으며, 향토사 연구와 자료수집, 집필, 편찬에만 몰두하였습니다.
유계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향토사에 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안동향토지]를 저술하기 위해 10여 년간 안동지역 전역 뿐만 아니라 서울 도서관과 박물관을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자료를 수집한 끝에 마침내 상, 하 두 권의 <안동향토지>를 완성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유계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신체적인 고통을 감내하면서 학구열을 불태운 학자였습니다.

퇴계선생과 금계선생

금선정은 희방 계곡과 함께 영주의 명승지입니다. 길게 이어진 노송(老松) 아래로 저마다의 모양을 뽐내는 기암괴석(奇巖怪石)과 그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의 조화가 아름다운 이곳에 비로봉 계곡에서 골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래서 풍기군수를 지내던 퇴계도 이곳에서 절경을 노래했었습니다.

신선 될 재주 없어 삼신산을 못 찾고
구름 경치 찾아 시냇물을 마셔 보네.
얼씨구 풍류 찾아 떠도는 나그네는
여기 자주 찾아와서 세상 시름을 씻어 보세.

이 절경에 세워진 정자가 금선정(錦仙亭)입니다. 금선정은 물가에 병풍처럼 드리운 큰 바위 위에 선녀처럼 앉아 있습니다. 원래 이곳은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 즐겨 거닐던 곳이라 합니다. 이곳에서 300m 뒤 산허리에 금양정사(錦陽精舍)가 있습니다. 이곳은 퇴계의 제자인 황준량이 독서를 하던 곳입니다. 하지만 그는 퇴계보다 일찍 타계(他界)했다. 퇴계와 금계를 만날 수 있는 이곳을 찾기는 쉽습니다. 동양대학교 앞으로 난 길을 따라 비로사 쪽으로 가면 첫 번째 사거리가 나옵니다. 왼쪽이 풍기 시내 쪽으로 가는 길이고, 맞은편이 비로사 쪽, 오른편이 금선정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1㎞ 못미처 금선정이 있습니다. 금선정이 있는 계곡은 20년 전의 모습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무분별한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그 모습이 자랑스럽습니다.
소백산의 영봉 비로봉에서 남쪽으로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풍기의 삼가동, 욱금동, 금계동에 이르는데, 이 풍광의 골짜기가 금선계곡으로 북천이라고도 합니다. 소백산의 실개울이 모여서 심산유곡을 흘러내려 오는 동안 거울처럼 맑은 시내가 되어 기화요초의 숲을 스치고 괴암절벽의 기슭을 돌아 정감록의 마을 금계리에 이릅니다. 개울은 반석 위를 미끄러져 흐르면서 청담을 이루기도 하고, 기암괴석의 절벽을 만나 폭포가 되기도 하면서 절경을 이룹니다. 조선조 대학자이며 퇴계의 제자인 금계 황준량이 큰 바위로 이루어진 언덕을 금선대라고 명명하였습니다. 풍기군수인 이징계가 남긴 친필로 금선대란 글자가 서각 되어 있으며, 그 금선대 위에는 황준량의 후손들의 정자인 금선정이 있으니, 금선계곡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풍기읍 금계2리에 가면 금양정사가 있다. 이곳은 황준량이 독서를 하던 곳이다.

'죽령의 밑 금계 위에 돌아가고자 그곳에 두어 칸 집을 지어 금양정사라 이름 하고 책을 쌓아 도를 궁구하는 자리로 삼고 독실하고도 학문을 좋아하는 의지로 심신을 침착하게 하여 수양하려 하였는데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죽으니 안타깝다.'

퇴계는 제자인 금계가 서거하자 위와 같이 행장을 적으며 이 금양정사를 떠올렸습니다. 금계 선생과 퇴계선생의 만남은 농암 이현보 덕분입니다. 금계는 농암의 아들인 이문량의 사위였습니다. 그래서 17년 연상인 퇴계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는데, 퇴계를 통해 비로소『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등 성리학을 접하게 되고 주자의 글을 읽게 됩니다. 책상 앞에 앉으면 밤낮 없이 계속하여 독서와 사색에 잠겨 침식을 잊을 지경이었다고 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이들이 혹 건강이 상할까 염려하면서 이르기를, “글을 읽고 공부함은 마음을 다스리고, 기(氣)를 기르는 일인데, 어찌 독서함으로 병이 생기겠는가. 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으나, 그것은 명이요, 공부의 죄가 아닐 것이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의 이러한 학문하는 자세는 신령현감, 단양군수, 상주목사로 고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밝은 지혜와 청렴한 자세로 한결같은 치적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20여년의 벼슬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었을 때, 염습에 쓸 만한 천이 없었고, 널에 채울 옷가지가 없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효성과 우애가 두터워 언제나 물건이 생기면 먼저 어버이께 드리고 동기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이웃의 어려운 사정을 알면 늘 힘껏 도왔다고 합니다.

그는 고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밝은 지혜와 청렴한 자세로 한결같은 치적을 거두었습니다. 신령현감으로 부임하였을 때,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황준량은 백성들의 굶주림을 자신의 일같이 여겨 보살피며 참혹함을 구제하는가 하면, 전의 현감이 관의 재물을 많이 축낸 것을 절약‧긴축으로 충당하여 그 문전을 불살라 버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항상 학교 교육에 힘썼는데, 문묘를 새롭게 하였는가 하면 학사를 새로 창건하여 백학서원이라 하고 서적과 전토(田土)를 장만하여 선비들이 모여 공부하고 성현을 흠모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또 단양군수로 부임하였을 때, 거의 쓰러진 상태의 고을을 다시 일으키고자 임금에게 진폐소(陳弊疏)를 올렸는데, 4천 8백여 자의 명문장으로 임금을 감동시켜, 명종은 “모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함이라, 내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라고 칭찬하며, 단양고을의 공납 20여 가지를 10년 동안이나 면제해 주었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게 하였고, 시냇가 산비탈에 서 있어 넘어질 염려가 있는 향교를 군의 동쪽으로 옮겨 지어, 고을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또 이 지방 출신인 우탁의 학문과 충절을 세상 사람들의 표준이 된다고 하여 문묘의 서쪽에 따로 집을 지어 제사지내게 하였습니다. 황준량이 단양을 떠나자 고을 백성들이 그의 덕을 기려 송덕비를 세웠는데, 아직까지 구단양 향교 앞에 서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임지는 성주입니다. 전임자가 세운 염봉서원을 증축하여 아름다움을 갖추게 하고, 문묘를 증수하는가 하면 교란을 두어 지방의 제자들을 가려서 가르치고, 매달 강회(講會)를 열어 생도들로 하여금 배운 글을 따로 외게 하고, 풀이하게 하여 성적에 따라 상벌을 베풀었습니다. 또 고을의 동족에 있는 공곡에 공곡서당을 짓고, 팔거현에는 록봉정사를 지어 여러 방면에서 선비들을 모아 길렀다고 합니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도타와 언제나 물건이 생기면 먼저 어버이께 드리고 동기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의 어려운 사정을 알면 늘 힘껏 도왔습니다. 그래서 20여 년의 벼슬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었을 때, 염습에 쓸 만한 천이 없었고, 널에 채울 옷가지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퇴계는 그의 죽음에 더 애석해 했습니다. “슬프다. 금계가 이에 이르렀는가. 하늘이 이 사람을 어찌 그렇게도 빼앗는가. 참인가. 꿈인가. 참 황망하여 목이 막히네. 슬프다. 금계요! 한 번 가면 돌아오기 어려우네. 끝이 났네. 끝이 났네. 슬프고, 슬프도다.” 이렇게 퇴계는 제문을 지으며 통곡을 했습니다.

격암 남사고선생과 정감록

‘조선 최고 예언가’로 통하는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1509~1571) 선생은 조선 중기 학자로서 고향은 경북 울진입니다. 역학, 풍수, 천문, 복서, 관상의 비결에 도통한 이인(異人)으로 앞일을 정확히 예언했다고 합니다.
격암은 풍수지리에 많은 일화를 남겨 그의 이름으로 된 도참서(圖讖書)인 ‘남사고비결(南師古祕訣)’과 ‘남격암십승지론(南格庵十勝地論)’이 ‘정감록(鄭鑑錄)’에 전합니다. 400여 년 전 풍기땅을 찾아왔던 남사고 선생은 우뚝 솟은 소백산을 보고는 말에서 뛰어내려 넙죽 절을 하고는 ‘저 산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며 찬탄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그는 우리나라 명산 중에서 소백산의 기운이 가장 온화하고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 말처럼 소백산은 우리나라의 악산과 달리 중턱 이상을 올라가면 바위가 거의 없는 흙산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산봉우리의 생김새가 부드럽고 멀리서 바라본 연봉들은 물결처럼 부드럽게 뻗어 갑니다.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1,300~1,400m 높이에서 연화봉~비로봉~국망봉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에는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그 초원에는 눈보라치는 겨울철을 제외하고 언제나 야생화가 지천이다. 당연히 소백산 트레킹의 백미는 초원지대를 따라 이어진 산등성이 산행이다.
격암 남사고와 관련한 여러 가지 설화가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구천십장 (九遷十葬) 남사고야 복중절사(服中絶死) 웬말이냐"라는 구전설화입니다.
이처럼 남사고 선생은 역학ㆍ천문ㆍ복서ㆍ관상에 능했으며, 풍수학에도 조예가 깊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많은 일화를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