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소개
마을 소개
영주시 풍기읍은 북쪽을 지나는 소백산과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하며, 소백산 죽령북쪽으로 단양군과 마구령 북쪽으로 영월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영주시와 예천군과 경계를 이루며, 풍기읍을 흐르는 남원천은 금계리에서 흘러나온 금계천이 합류되어 서천을 이루고, 봉화에서 유입된 내성천과 합류되어 예천군을 흐르다가 낙동강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1541년 주세붕이 소백산에서 자생하는 산삼종자를 채취해 풍기읍 금계동 임실마을에서 재배를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인삼의 발원지로 명성을 알리고 있으며, 금계리는 동으로 교촌리, 서로는 백동, 남으로는 서부리, 북으로는 욱금리와 인접해 있으며, 지형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이라 금계천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금계리는 소백산 자락에 위치하여 산림자원이 풍부하고, 남으로는 농경지와 과수원이 있고, 금계천 주변경관은 소나무와 함께 수려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마을연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는 다른 지역보다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수량도 풍부하고 농지가 광활하여 십승지의 미래적 개념임 안유한락(安裕閒樂)의 자기 충족적 삶을 누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충분히 구비함으로써 활승지(活勝地)로서 가장 으뜸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광여도에 나타난 풍기지역
풍기는 신라시대 기목현으로, 고려시대에는 길주에 속하였으며, 조선시대에 풍기로 명명되었고, 풍기읍은 조선시대에는 풍기군 동부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1914년 동부면에 서부면, 창락면, 와룡면이 합쳐져 풍기읍이 되었습니다.
풍기읍의 지명은 옛 풍기군을 그대로 계승하였고, 1973년 풍기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교촌리는 풍기향교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향교는 본래 금계리에 있었는데,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1453년에 이곳으로 옮기면서 신교촌으로 불리던 동네입니다.
금계리는 옛 풍기군 서부면 구교리이며, 풍기향교가 처음 이 마을에 창건되었다가 1735년 교촌리 현 위치로 이전되었기 때문에 금계리는 구교리로 불리어졌으며, 산재해있는 마을로 임실 안마, 부계발 밭마 쇠바리, 잿밭, 용천동, 공원밑이 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모두 금계1리로 되어 있어 풍기읍에서 가장 큰 마을 중에 하나입니다.
정확한 지명은 영주시 풍기읍 금계1리으로 뒷산에는 유명한 금계바위가 있고 산줄기가 동네는 포근히 감싸안아 마치 금계가 알을 품는 즉 ‘금계포란형’의 명당으로 동네이름도 만들어졌습니다.
금계란 금닭으로서 산 위의 바위들이 마치 닭벼술처럼 생겼다고 해서 만들었는데 일제 강점기 시대에 광석을 캐기 위해서 폭파한 후로 원형을 잃고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고 하며, 이 마을의 이름은 지금은 삼가동이라 하나 옛날에는 금계동이라고 부렀으며, 이곳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10승지지로 100여년 전부터 많은 피난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세계대전이 발생하면 이곳에서 인간의 씨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 곳이기도 하며, 지금도 풍기읍과 그 일대에는 이북 출신의 많은 피난민들이 살기도 한다. 마을의 뒷산에는 닭의 모양과 비슷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가리켜 ‘닭산’ 즉 금계바위라고 부르며, 옛날 이 바위의 가운데 부분에는 많은 금이 묻혀 있었다고 하며 또한 닭의 눈이 되는 부분에는 두 개의 빛나는 보석이 박혀 이 마을을 지켰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동네의 수호신으로 믿어왔고, 그러던 어느날 이곳을 지나던 어떤 나그네가 이 바위에 대해 들은 바가 있어 일확천금을 노리고 가파른 절벽을 간신히 기어 올라가 금계바위에 박힌 보석을 빼려고 했다고 하며, 그 때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덮이기 시작하며 캄캄한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져 이 벼락으로 인해 바위의 일부분이 무너져 내리고 그 나그네는 바위에 깔려 숨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나그네가 빼려고 한 보석은 묻혔는지 간 곳이 없었고, 이러한 일이 있는 후에 이 마을이 차차 가난해지기 시작해 사람이 살기 어려워졌다고 하며, 일제 강점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없어진 보석을 캐내려고 이 마을에 많이 모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바위의 형태도 닭처럼 보이지도 않으며, 다만 그 당시의 일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많은 수정 조각들이 금계 바위 부근에 흩어져 있다고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금계1리
공원산 마을
시내부근의 마을로 옛날 보평대(保平坮)와 제운루(齊雲樓)가 있어 불러진 이름이며 1980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현대화된 가옥이 많습니다.
성주마을
마을 앞 넓은들 가운데 위치한 마을이며 성주들(성뒷들)이라고도 합니다. 그 밖에 구 향교골 등이 있으며 2012년 조성된 개삼터 길이 있는 곳이기도 하며, 주요 생산 농산물은 인삼, 사과, 벼, 도라지, 황기 등을 재배합니다.
부계밭 마을
부거밭, 부용천 연꽃이 만개한 모양을 칭하여 부르며, 1542년 주세붕 풍기군수가 이곳에 인삼을 심도록 장려하여 처음으로 인삼을 재배 풍기인삼의 시배지가 되었습니다.
잿밭 마을
잣밭, 백전 옛날 이곳에 잣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백전이라 부르고 또 낮은 곳에 있는 밭이라 하여 잿밭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일제시대에 금계광산이 호황을 누릴때 주막이 있어 잿밭주막이 유명하였으며 1945년 금계중학교가 설립된 곳입니다.
임실 마을
임실(任實) 또는 연실(蓮實)이라고도 부릅니다.
소발리 마을
소발리(小發里) 만개하지 않은 작은연꽃이라 하여 소발리라 부릅니다.
용천동 마을
용천사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되고 1943년 저수지를 조성 천동못이라고 부릅니다. 용천동 우측으로 1시간 가량 올라가면 흡사 닭의 벼슬이 두개로 보이는 금계바위가 나옵니다.
금계2리
장성 마을
장성 마을입니다.
금선정 마을
금선정 마을입니다.